# 생잔반 반입 감시원
# 용인에서 ‘인생 이모작’
# 35년 특전사의 삶
# 부사관 최고의 지위 ‘특전사 주임원사’ 7년
# 문재인 정부의 안보정책 평가
# 백군기 장군과의 인연
# 육해공 3대 군인가족을 꿈꾸다
# 청년들에게 던지는 메시지
6월 23일 밤, 아니 자정이 넘었으니 24일 새벽이라 해야겠다.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매산리와 포곡읍 신원리를 잇는 지방도 321호선에 설치된 초소에서 뜻밖의 인물을 만났다.
올해 우리나라 나이로 64세인 김영진(포곡읍 삼계리)씨가 주인공이다. 그는 특전사령부 주임원사로 7년간 복무하다 지난 2008년 퇴역 후 용인에서 제2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알 만한 사람은 알겠지만, 특전사 주임원사는 장성급 예우를 받을 만큼 꽤 높은 자리다. 육군 부사관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최고의 지위라 할 수 있다. 어디서든 특별대우를 받았을 그가 늦은 밤 열악한 환경의 초소에서 근무를 하고 있다니, 이유가 궁금했다.
현재 김영진 씨가 하는 일은 모현과 포곡 일대 돼지농장에 들어가는 음식물류 폐기물(생잔반) 차량을 감시하는 업무다. 초소에서 생잔반을 싣고 오는 차량을 발견하면 바로 미행을 해 증거를 포착한다. 반입 차량번호와 농가이름 등을 기재해 사진과 함께 용인시청 담당부서로 보내는 것까지가 그의 역할이다.
“작년부터 시작해 전반기 3개월, 후반기 3개월을 초소에서 일했고 올해는 전반기 3개월 근무가 끝나고 10월까지 연장이 돼 계속 감시원으로 근무하고 있어요.”
작년까진 초소의 야간조 근무는 없었다고 한다. 잔반차량이 농가에 들어가는 때가 주로 새벽 시간이라는 것을 파악한 김씨가 시청에 제안하면서 24시간 3교대 근무로 전환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 이후 잔반차량이 크게 줄었다고.
김영진 씨가 감시원으로 일하게 된 건 용인시일자리센터의 구인구직 매칭 덕분이다. 김씨가 작성해 놓은 구직신청서를 보고 센터가 현재 일자리를 소개해주면서 시작하게 됐다.
그는 “일을 해보니 괜찮다”며 “내가 사는 지역에서 하니 마음도 뿌듯하고 집과 가까워서 좋다”고 만족해했다.
사실 주임원사로 전역하면 300만원이 넘는 연금을 받기에 굳이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사는데 지장은 없다. 그럼에도 사서 고생을 하는 이유는 뭘까.
“은퇴 후에 내가 가지고 있는 경험을 살려 사회에 기여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그래서 봉사도 하고, 월드비전 같은데 기부도 하고… 지금 하고 있는 일도 돈을 벌기 위한 마음보다는 지역 봉사 차원에서 하고 있는 겁니다.”
김씨는 전역 후 서울에 있는 기업 경비업체 관리소장을 하며 30~40명의 경비원을 관리하는 등 주로 경비·보안 업체 쪽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지역에서 일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앞으로도 지역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김영진 씨.
이쯤에서 묻고 싶은 말이 있었다. 왜 용인이었을까.
1973년 고등학교 졸업 후 당시 공수하사관에 지원한 그는 특전사에서만 35년 동안 있었다고 한다. 용인과의 인연이 있을 리 없었다.
그가 용인에서 인생 이모작을 시작하게 된 건 우연히 본 신문광고 때문이다.
“서울에서 쭉 살다가 전역을 1년 앞둔 시점 신문을 보는데 숲속의 아파트라는 문구가 담긴 광고가 눈에 들어왔어요. 그때 집사람 건강이 좋지 않아서 여기다 싶었죠. 2007년부터 바로 입주를 해서 살아보니 정말 좋더라고요. 이사 오길 정말 잘 했어요.”
이제 군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볼까. 뻔한 질문을 던졌다. 잠시 문답형으로 전환.
Q. 군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뭔가요?
A. 고된 훈련이죠. 천리행군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우리가 지리산 최초 천리행군을 했는데, 30~40kg 군장을 짊어지고 지리산에서 부대까지 6박7일 만에 돌파했지 뭡니까. 군화에 피가 질질 흘렀어요. 천리행군이 생긴 게 김신조 사태 때문인데, 그 사람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어요.
Q. 특전사 하면 강하훈련이 생각나는데?
A. 역시 스릴 있고 가장 보람찬 훈련은 스카이다이빙입니다. 공포감이 어마어마해요. 실제로 많은 전우들이 희생됐죠. 비행기 탈 때는 사색이 돼서 오줌을 싸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조장 신호에 따라 밖으로 나가면 기분이 짜릿하고 좋아요. 10~20초 정도 자유낙하를 하다 3000피트에서 낙하산을 펴는데, 그때 희열은 말로 설명이 안 돼요. 하지만 강하라는 것은 100회를 하든 1000회를 하든 공포감이 똑같습니다.
Q. 주임원사로 근무할 때 병사들에게 가장 강조했던 말이 있다면?
A. 신세대 장병들에게 한국사에 대해 설명해주고 국방의 의무 중 하나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 굉장히 큰일이라고 얘기해주곤 했습니다. 부모님들이 편하게 잘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얼마나 큰 임무를 하는 것인지 깨닫게 해줬죠.
Q. 군인으로서 소신이나 좌우명이 무엇이었나요?
A. 초심입니다. 육군하사 모병으로 들어간 초심의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어요. 또한 열정과 끈기를 갖고 정직하게 살고자 했습니다. 훈련이 고되다 보니 탈영을 3번이나 하려고 했었는데, 불가능할 것 같은 어려운 일을 해낼 때마다 ‘하면 되는구나’ 라는 생각에 참아냈습니다. 그 이후로 부사관 최고의 수장인 특전사 주임원사를 꿈꿨죠. 특전사는 부사관 숫자가 9000명이 넘어요. 그만큼 가기 힘든 자리라 자질, 능력, 인품 등 조건이 까다롭습니다. 하지만 끈기를 갖고 43살에 야간대학에 가서 공부를 하는 등 자격을 갖추기 위해 애썼어요. 결국 높은 경쟁률을 뚫고 2002년에 주임원사가 됐습니다.
Q. 그 어려운 문을 뚫고 주임원사로 선정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A. 군 생활 가운데 여러 가지 보직을 마스터 했습니다. 전투부터 주특기, 인사, 공수, 작전, 정보, 인사계, 경기부소대장, 복지시설 관리장, 작전하사관 등을 두루 거쳤죠. 특수교육을 이수하고 표창도 꽤 받았습니다.
군에서 비교적 높은 자리를 경험한 그이기에 현재 우리나라 안보 상황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문재인 정부의 안보 정책, 어떻게 평가할까.
“새로운 정부 들어와서 아주 잘하고 있어요. 오늘도 대통령이 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참관하셨는데, 잘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걸 보여줘야 해요. 북한이 하면 우리도 대등한 군사력을 갖고 있다는 걸 똑같이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 그래야 씨알이 먹힙니다. 대통령이 특전사 출신이라 노하우가 있어 잘하시는 것 같습니다.”
현 정부에 후한 평가를 내린 김영진 씨. 그는 문재인 정부 초대 국방부장관 후보자로 이름을 올린 백군기 전 국회의원과도 인연이 있다고 했다. 백 전 의원이 특전사령관을 지내던 당시 2년간 주임원사로 함께했다는 것.
“백 장군님은 5공수 특전여단 작전참모를 할 때부터 지켜봤는데, 마인드도 좋고 업무에 대해 따라올 자가 없었습니다. 추진력이 대단했어요. 정도에서 벗어나는 일도 없었죠. 그때나 지금이나 생활하는 모습은 똑같아요.”
인터뷰의 종반부에 이르자 가족 이야기가 나왔다. 군인으로서 소박한 바람, 꿈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1남 1녀를 두고 있는데, 큰딸은 시집가서 남양주에 있어요. 아들은 37살이고 현재 공군 부사관으로 근무하고 있죠. 자식을 낳으면 해군에 지원하게 해보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얘기하곤 해요. 3대가 육해공군 만들어 보자고요.(웃음)”
훗날 ‘육해공 3대 가족’이라는 타이틀이 담긴 기사에 등장하는 날을 기대해본다.
1시간에 걸쳐 즉흥으로 진행된 인터뷰. 마지막 질문은 무얼 던져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오늘날 청년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부탁해봤다. 주임원사 시절 수많은 청년들과 마주했을 그였기에 특별한 메시지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요즘 젊은 친구들, 우리 세대와 비교하면 여러 가지 면에서 월등하지 않나 싶어요. 갖고 있는 지식이나 사고방식이 발달했다 생각해요. 그런데 조금 부족한 것은 어려운 일을 회피한다는 겁니다. 차곡차곡 쌓아나가서 이루려 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을 잡아서 금방 성취하려는 조급함, 그런 마음이 아쉬워요. 워낙 힘든 세상이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일거리는 많아요. 젊은 친구들이 조금만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봤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