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년째 운영 중인 전대리 ‘장오카센타’
# 돈 욕심 없는 사장님과 고지식한 직원
# 쓸모없는 장비 사게 하는 부당한 제도
# 에버랜드에 뺏긴 고향 ‘가실리’의 추억
# 전대리에서의 삶…일과 결혼, 그리고 산
# 산이 좋은 이유 “한계를 테스트하는 맛”
# 청년을 위한 메시지 “하고 싶은 거 해요”
에버랜드와 인접해 상권이 형성된 곳. 처인구 포곡읍 전대리다. 이 동네에서 30년간 카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심기석(54)씨를 만났다. 전대2리 이장님이기도 하다.
그와의 대화는 여전히 유쾌했다. 9년 전 엔진오일을 교체하다 맺어진 ‘인연’이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단골은 아니다. 차량을 바꾸기 전까지 1~2년간 자주 보던 사이라고 해야 할까. 꽤 오랜만의 만남임에도 편하고 친근한 ‘그런 인간미’가 있는 사장님이다.
인터뷰는 지난 10일 저녁 무렵 약 1시간 반 동안 ‘격 없이’ 진행됐다. 고리타분한 글쓰기 형식을 살짝 비틀어 모현청년 나름의 스타일로 그의 삶을 풀어보고자 한다.
장오카센타.
20대 중반이던 심씨가 호기롭게 차린 자동차 정비업소 이름이다. 그때만 해도 알았을까? 이렇게 오랜 시간 한 곳에서 기름 냄새를 맡게 될지. 아마 상호가 한 몫 했던 것 같다.
장오카센타의 ‘장오’는 사실 ‘장호’였다고. 대충 지어낸 이름이 아니었다. “아들 이름이겠지”라고 생각한 과거 단골의 흔한 착각을 깨어버린 그의 한마디.
“그게, 사람 이름이 아니라 긴 장(長)자에 맑을 호(淏)야.”
심씨가 말을 놓는 이유는 학교 선배이기 때문이다. 모현청년은 태성고 47회, 그는 28회 졸업생이다. 대선배지만 공과 사는 구분, 아니 독자 분들을 위해 다시 존칭으로 바꾼다.
“사람 이름이 아니고요. 긴 장(長)자에 맑을 호(淏)입니다.”
깨끗하게 오래 영업하라는 의미일까. 1988년 개업을 앞두고 한 스님이 지어준 거란다. 덕분에 한 곳에서 30년 가까이 카센터를 운영하고 있다는 심씨. 아쉬움도 살짝 섞여 있었다.
“길게 가고 있는 건 좋지만, ‘호’자 때문에 지금까지 돈을 벌지 못했나 봐요.(웃음)”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모르겠으나, 심기석 씨의 경영철학도 ‘장호’라는 이름과 노선을 함께 가고 있다. 가치관 또한 그렇다.
“저는 이것저것 재는 걸 싫어합니다. 내가 많은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요. 남들보다 내가 많이 벌라고 하면 남을 이용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우리 직원도 제가 하도 그러니까 너무 고지식할 정도로 돈 욕심이 없어요. 어쩔 땐 공임비로 조금 더 받아도 되는데, 받을 것만 받더라고요. 그냥 제 팔자려니 해요.(쓴웃음)”
그와 10년 가까이 함께하고 있는 안청표(44.기흥구 서천동)씨를 일컫는 얘기다. 심씨는 안씨와 일하게 된 첫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손님이 잘해주면 간 쓸개 다 빼주고, 막 대하면 너도 똑같이 막 대하라고 했죠. 손님 떨어지면 월급 덜 주면 되는 거고, 잘 벌면 더 준다고 얘기했어요. 절대 손님에게 기죽지 말라고요. 정당한 기술을 받고 정당한 대가를 받는 건데 말이에요. 지금도 진상 손님이 오면 우리는 다른 데로 보냅니다. 그 사람들 아니더라도 밥 세끼 먹으며 사는데, 아쉬울 거 없어요.”
두터운 신뢰 속에 안씨는 언젠가부터 가족이 됐다고. 심기석 씨와 그의 아내가 집을 비울 경우 아이들 밥까지 차려준단다. 참고로 카센터가 심씨의 집이다.
(훈훈)하지만, 아무리 돈에 욕심이 없다 해도 재정상태가 좋지 않으면 힘들기 마련이지 않나. 그는 돈보다는 부당한 제도 때문에 힘이 들 때가 있다고 했다.
“우리나라 제도가 잘못 됐어요. 쓸데없는 법정장비를 사라고 해서 정작 우리가 필요한 걸 구매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어느 한 사람 장사시켜주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전혀 쓸모 없는 걸 사놓고 창고에 쌓아놓곤 해요. 사용하지도 않는 걸 300만원 넘게 들여서 사놓으면 마음이 아프죠. 정책이나 법이 현실과 너무 안 맞아요.”
카센터를 운영하는 많은 사장님들이 공감할 만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허나, 갑자기 무거운 주제로 흘러가는 것 같아 화제를 바꿔봤다.
과거. 심기석 씨의 꼬꼬마 시절 에피소드다.
포곡 토박이인 그의 고향은 전대리가 아닌 가실리다. 에버랜드 뒤, 호암미술관이 위치한 곳이 그가 어릴 때 살던 동네란다. 그가 기억하는 가실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산골자기였죠. 전형적인 시골동네였는데, 집이 꽤 많았어요. 지금 에버랜드가 있는 곳은 논밭이었고, 호암미술관 앞 호수도 논밭이었다가 인공저수지로 조성된 거예요. 부모님 말씀 들어보면 저희 집안이 가실리에서 꽤 오래 살았다고 해요. 6대조 할아버지 산소도 이곳에 있으니까요.”
심씨는 가족이 삶의 터전을 떠나게 된 시점을 1973년으로 기억했다. 그가 10살 때다. 자연농원 조성을 위해 중앙개발이란 회사가 땅을 대규모로 매입하면서 현재 카센터 자리로 이주하게 됐다는 것.
반강제적이었다고 했다. 그때는 다 그랬나 보다.
“아버지 이야기를 들어보면 당시 면장님이 동네 사람들에게 도장을 달라고 해서 땅을 팔게 했다고 하더라고요.”
할머니와 부모님, 형, 여동생까지 6식구가 전대리로 거처를 옮긴 뒤 삶의 모습도 바뀌었다고 한다. 농사를 짓던 아버지는 조경 일을 하게 됐고, 심씨는 학교 다니기가 편해졌다. 가실리에서 그가 다닌 포곡초등학교까지 거리는 걸어서 약 1시간. 어린 심씨에겐 고향을 떠나야 한다는 슬픔보단 학교가 가까워진다는 생각에 내심 기쁘지 않았을까 싶다.
전대리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그는 졸업 후 자동차 정비에 관심을 갖게 됐고, 마침 공병부대를 가면서 정비 자격증을 따게 된다. 전역 후엔 회사에 취직해 정비 일을 배우다 몇 년 뒤 가게를 직접 차리게 되는데, 장오카센타의 시작이다.
결혼은 당시로선 늦은 나이에 했다. 32살에 후배의 소개로 운학리에 살고 있던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고. 5살 어리지만 성향이 비슷해 취미생활을 함께 즐긴다고 한다.
취미=등산
단순한 등산이 아니다. 백두대간 종주를 할 정도라는데, 심씨는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리만 잡으면 아내와 함께 배낭 메고 처음부터 끝까지 며칠 동안 산행을 해보는 게 꿈이라고 했다.
심씨의 자녀는 현재 대학교 1학년과 고등학교 3학년 두 아들로, 뜻을 이룰 날이 멀지 않아 보인다. 물론, 아내가 허락해야 가능한 일이지만 말이다.
이쯤에서 이런 질문 하나 던져야겠다. 산이 왜 좋은가.
“몇 년 전에 친구들이 등산을 가자고 해서 갔었는데, 좋더라고요. 제가 옛날부터 운동을 해서 체력은 좋거든요. 그때부터 빠지지 않고 등산모임을 가고 했는데, 아마 지금까지 몇 백번도 넘게 산에 올랐을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산이 왜 좋냐 하면 풍경을 가지고 얘기하는데, 저는 나 자신을 실험할 수 있다는 게 좋은 것 같아요. 한계를 얼마나 극복하나 그런 걸 테스트하는 맛이 있습니다. 고통을 이겨내면 희열이 있어요.”
고통을 극복하는 것처럼 스스로에게 만족을 느껴야 행복하다는 심씨. 지금까지의 삶은 만족하는지 궁금했다.
“만족한 것도 없지만, 불만족한 것도 없어요. 내가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살았으니까. 행복은 내 마음에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좋으면 되는 겁니다. 남들에게 나를 존경해주길 바라거나 그러고 싶지도 않고, 욕먹을 짓만 하지 않으면서 살면 그걸로 됐어요.”
마지막으로 청년들에게 한마디 부탁했다. 인터뷰어가 청년이라는 점을 감안해 일종의 ‘공식질문’으로 봐줬으면 좋겠다. 물론, 50대 이상의 인물일 경우 가능한 질문이겠지만.
“하고 싶은 것 하면서 마음 가는대로 살아요.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자신 있게 하면 됩니다. 좋은데 취직해서 남들에게 무시 받는 것보다 회사가 작더라도 내 능력을 인정받는 게 나아요. 내 역량을 펼칠 수 있는 데서 인정받으며 일하는 게 최고 좋은 거라고 봐요.”